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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교계브리핑 - 100년전 3.1운동, 기독교의 역할은?

2019-01-17

앵커 : 한주간의 기독교계 이슈를 살펴보는 주간 교계브리핑 시간입니다. 오늘은 국민일보 장창일 기자가 스튜디오에 나와있습니다.
장기자 오늘 어떤 소식 준비하셨나요?

기자 : 네 올해는 3.1운동 100년이 되는 해인데요. 100년전 3.1운동에 관한 이야기를 준비해 봤습니다.

앵커 : 네, 전해주시죠?

기자 : 3.1운동 100년을 맞아 이를 기념하고 의미를 되새기기 위한 다양한 행사와 또 심포지엄들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얘기하면 3.1운동은 당시 종교간 협력이 민중의 참여를 이끌었다고 이야기 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3·1운동은 개신교와 천도교, 불교의 합작품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 장로교와 감리교의 연합은 각 교단의 중심지인 평양과 서울을 잇는 가교가 됐습니다.
이런 협력으로 민중의 대규모 참여가 가능했는데요. 일제강점기, 종교 지도자들이 나서지 않고는 전국적인 만세운동은 불가능했다는 게 학계의 일반적인 평가이기도 합니다.

정병준 서울장신대 교수는 “당시 인원을 모으고 자금을 동원할 곳은 전국 조직을 갖췄던 종교계뿐이었다”면서 “이들의 조건 없는 협력이 거사를 가능하게 한 힘이라고 볼 수 있다”고 밝혔고 “1차 세계대전 직후 ‘일원화’ ‘대중화’ ‘비폭력화’라는 3·1운동의 원칙을 정할 수 있었던 것도 종교 지도자들이 얼마나 폭력 없는 세상을 꿈꿨는지 엿 볼 수 있는 대목”이라고 했습니다.

앵커 : 그렇군요. 흥미로운 이야기인데요. 좀 더 자세한 설명 부탁드립니다.

기자 : 민족대표 중 기독교 측 대표였던 이승훈 장로는 평양신학교에서 공부했던 대표적인 장로교인이었죠. 그는 1919년 2월 대규모 만세운동이 준비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취지에 공감한 뒤 곧바로 평안북도로 가 감리교의 신홍식 목사와 장로교의 길선주 목사를 만나 만세운동을 설명하고 협조를 구하죠. 이들은 결국 민족대표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이 장로가 교단의 벽을 넘어 감리교 지도자의 협력을 얻어낸 것이었습니다. 결국 민족대표엔 장로교인 9명, 감리교인 7명이 참여했습니다. 여기에 청년단체인 YMCA까지 참여하면서 세대를 초월한 민족 대연합이 성사된 것이죠.
이런 면에서 3·1운동은 자생적 에큐메니컬 운동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평화를 위하 비폭력 일치와 연합을 했기 때문이죠.
임희국 장로회신학대 교수는 “당시 지도자들이 에큐메니컬이란 개념을 몰랐겠지만 그들의 활동을 살펴보면 에큐메니컬적인 요소가 돋보인다”면서 “평화에 대한 인식이 유럽보다 빨랐고 폭력으로 평화를 얻을 수 없다는 각성이 100년 전 이 땅에 있었다는 점을 높이 평가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앵커 :3·1운동과 관련한 소식들이 많은데요. 선교사들이 3·1운동을 지지하지 않았다는 말이 있는데 어떤 내용일까요.

기자 : 네. 3‧1운동과 관련해선 선교사들의 이름을 듣기 어려운 게 사실입니다. 이미 1919년 조선에는 수백 명의 선교사가 사역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활동상이 드러나지 않자 ‘선교사들이 조선의 독립을 방관했다’는 의혹이 나오는건데요.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조선헌병사령부가 3‧1운동 직후 펴낸 ‘조선3‧1독립소요사건 보고서’엔 “대부분의 선교사가 (독립운동에 참여한) 조선인에 대해 동정심을 가지고 있다. 반면 우리 ‘관헌’에 대해선 반감이 있다. 또 소요를 진압하는 것에 대해서도 불평을 한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방관이라고 보기는 어려운 부분입니다.

앵커 : 3·1운동을 적극 지지한 선교사들도 있다고요.

기자: 네. 대표적인 선교사가 프랭크 스코필드였습니다. 이 선교사는 제암리 학살을 전 세계에 알린 인물인데요. 그는 제암리에서 일제에 의해 학살이 벌어졌단 소식을 듣고 1919년 4월 17일 현장으로 향했습니다.
그곳에서 제암리교회와 주변의 민가들이 모두 잿더미가 된 광경을 목격하는데요. 이를 촬영해 외신기자들에게 전달합니다. 이로인해 전 세계가 일제의 만행에 분노하게 됩니다.

호머 B 헐버트 선교사도 미국 조야에 조선의 현실을 알리는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평소 친분이 있던 미국 상원의원들을 설득해 미국 의회에 ‘조선 독립 지지안’을 제출했습니다. 표결에서 찬성 34표, 반대 46표로 부결되고 말았지만 조선이 독립을 원하고 있다. 일제를 거부한다는 사실을 알리는 데 큰 역할을 했죠.

앵커 : 그렇군요. 3.1운동은 우리 민족이 반드시 기억하고 후대에 알려야할 역사적 사건이죠. 3.1운동 100주년을 맞는 올해, 이러한 사연과 의미들이 더욱 많이 발굴되고 알려졌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다음소식으로 넘어가보죠. 교회 교인들을 상대로 대대적인 사기를 치는 일이 발생하고 있다면서요?

기자 : “대구 지하철 참사 피해자인데 후유증으로 희귀병에 걸렸고 얼마 전 위암 판정까지 받았습니다. 기도해 주세요.”라며 교회에 등록한 뒤 교인들이 모아준 위로금만 챙겨 잠적하는 ‘김모씨’가 있다는 소식입니다. 피해를 본 사례가 늘고 있어 각별한 주의가 요구됩니다.

앵커 : 기독교인들의 신앙심을 교묘하게 이용하는 것 같네요.

기자 : 네 그렇습니다. 김씨가 교회를 돌며 하는 호소는 비슷한데요. “아버지는 군목(소령)이었다. 부모님 사랑받으며 행복하게 살았다. 2003년 2월 18일 가족들과 지하철을 타고 가던 중 불이 났다. 정신을 잃었다. 그 사고로 부모님은 돌아가셨다. 친척들은 보상금을 가로챘다. 최근 위암에도 걸렸다. 하나님의 도우심만 구하며 산다.”는 겁니다.

관련해 한 목사는 “딱한 사정에 헌금을 했는데 김씨에게 전달하기 전 위암 진단서를 요구했더니 차일피일 미루다 잠적했다”고 말했습니다. 각별한 주의가 필요해 보입니다.

앵커 : 한국교회와 성도님들의 주의가 필요해 보이네요. 장창일 기자, 오늘을 여기까지 듣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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