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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절 기획① 한국교회가 주도한 3·1운동

2010-03-01


이처럼 3·1운동은 우리 민족의 독립과 자주의 정신을 세계에 알린 역사적 의미가 있는데요. 그 중심에는 기독교인들이 있었습니다. 양화수 기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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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 일본은 을사조약이라는 불평등 조약을 체결하고 외교권을 박탈했습니다. 일제의 무단식민통치시대가 시작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로부터 2년 뒤인 1907년, 평양에서 일어난 대부흥 운동은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민족의 구원에 눈을 뜨게 했고, 훗날 3·1운동의 정신적 토대를 제공합니다.
INT 임희국 교수 / 장로회신학대학교
불과 기독교역사가 1세대 밖에 되지 않았는데, 교회가 민족적 과제를 앞에 두고 사회적 책임을 다했다는 점에서 우리 민족사의 역사고 교회 역사라고 생각합니다.

당시 기독교인구가 전체의 1.5%에 불과했음에도 민족대표 33명 중 16명이 기독교인이었다는 사실은 3·1운동에 교회가 얼마나 깊숙이 관여했는지 보여줍니다. 또한 3·1운동이 일어난 전국 311개 지역 중 기독교인이 주도한 곳은 78곳에 달하며, 교회와 학교, 병원 등을 통해 1년 이상 지속할 수 있도록 뒷받침했습니다. 이로 인해 일제는 교회를 반일세력으로 규정, 제암리 지역의 15세 이상 남자들을 교회에 몰아넣고 방화 살해한 제암리교회 사건과 강서 사천교회, 정주교회 등의 교회 학살사건은 가장 처참했던 사례로 꼽히고 있습니다.
INT 서정민 교수/ 연세대학교
한국기독교가 희생의 십자가와 같이 이 운동 이후의 모든 현상의 책임을 감당했다는 것입니다.

3·1운동과 그로인해 교회가 큰 핍박을 받았던 사실 역시, 언더우드, 테일러, 스코필드 등 조선에 있던 선교사들을 통해 전 세계에 알려졌습니다. 우리 민족의 독립과 자유를 외쳤던 3·1운동. 그 밑바탕에는 예수그리스도의 순교정신으로 나라를 지키고자 피 흘렸던 선배 기독교인들의 희생이 있었습니다. CTS양화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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